태극기에 대한 나의 요즘 생각 - 김훈
P.5 돌이켜 보면, 철거와 급조가 거듭되는 가건물 안에서 엉덩이를 바닥에
붙이지 못하고 엉거주춤 쭈그리고 살아온 느낌이다.
⠀4.19 때 나는 중학교 신입생이었는데 서울 성북구 삼선동 성밑 마을에 살았다.
거리에 놀러 나갔다가 성북경찰서 앞거리에서 소속을 알 수 없는 건장한
사내들이 시위를 벌이던 대학생들을 각목으로 패는 장면을 나는 보았다. 살아서
뭔갈 소리치는 사람들의 머리통을 각목으로 후려치며 두개골 깨지는 소리가,
팍, 나면서 피가 솟구쳤고 맞은 사람은 길바닥에 쓰러져서 버둥거렸다. 한 번
후려칠 때마다 한 사람씩 팍, 팍, 팍 깨지면서 쓰러졌다. 피가 길바닥에 흘러서
흙으로 스몄다. 동네 엄마들이 쓰러진 대학생들을 떠메고 집안으로 들어가서
상처에 아까징끼(머큐로크롬)를 바르고 이불솜으로 틀어막고 홑청을 찢어서
싸맸다. 내 소년기는 이날의 절망과 무서움에 짓눌려 있었다.
P.10 말과 말들이 연대하는 물결은 모두 덕수궁 앞, 세종로, 광화문 앞으로
모여서 들끓고 폭발했다. 백성들은 거리에 가마솥을 걸어놓고 국밥을
끓여먹으면서 며칠씩 밤낮으로 자유발언하면서 황제의 결단을 요구했다. 덕수궁
안에서 황제는 두려움 속에서 진노했다. 황제는 민회라면 치를 떨었다. 황제는
자애로운 말로 타일렀고, 겁나는 말로 위협했고, 공권력과 비선조직의 폭력을
동원해서 짓밟았으나 연대해서 폭발하는 공론은 더욱 거세어졌다.
백만 가운데 하나 - 이영광
P.17 부자 부모 둔 것도 실력이라고, 철없고 독한 말을 뱉은 이는 해외에서
도피중인데, 늦은 밤 광장에는 부지런히 쓰레기를 치우는 십대 이십대들이 눈에
띈다. 집회는 열 번 넘게 열렸지만 광장은 늘 깨끗했다. 나는 이 젊은이들이
무언과 견디기 어려운 것을, 시대의 최전선을 견디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모든 밀려난 존재들의 악다구니는 아름답다 - 최현숙
P.40 탄핵이 성공하더라도 머지않아 언제든 판세는 뒤집힐 수 있다.
‘트럼프류’의 당선과 전체주의로의 회귀는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이번 한
번만 어떻게든 이기고, 앞으로는 여전히 선거에 지고 가끔 촛불만 들입다 들
것인가? ‘광장의 조증과 일상의 울증’(사회학자 엄기호)을 언제까지 계속할
것인가?
게이트들의 게이트, 촛불들의 촛불, 그리고 미디어
P.53 폭력과 비폭력의 이분법을 넘어서 있기에 오히려 국가권력 장치들을
후퇴시킬 수 있는 집단적 힘의 운동학, 대중적 포스의 물리학으로서 촛불을
사유해야 한다.
P.58 비리의 조직이 내부 인자들을 무력한 자동인형처럼 돌리고, 거꾸로 핵심의
인자들이 자신이 떠맡은 기관들을 순종적으로 돌릴 것이다. 그렇게 돌아가는
인간드로가 그렇게 돌아가는 구조가 맞물려 국가-비선-자본이라는 3중의,
공주-미실-부회장-언론이라는 4각의 게이트를 시스템적으로 완성한다.
‘박근혜적인 것’과 정동의 정치학 - 최진석
P.74 이때 권력 추구는 특정한 목적 실현적인 행위가 아니라 권력의 행사
자체에만 의미를 둔 자기 소급적 행위로 규정될 수 있다.
P.89 누가 시키거나 물질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았음에도 자발적으로 광장에
모여들어 청와대를 에워싸고 행진하는 대중의 운동은 그렇게 거기서 정치의
한계점까지 끌어올려진 정념의 표현일 것이다. 이토록 매혹적이며 위험한
대중적 정동을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P.92 악몽을 피하는 방법은 잠을 자지 않는 게 아니라 다른 꿈을 꾸는 것이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계속 잠자리에 들어야 한다. 그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인
것의 (재)발명은 실패하지 않는 지도를 구하는 게 아니라 지도에 없는 길을
가보면서 계속 지도를 그려나갈 때 가능할 것이다. 정치적인 것의 첨점은 늘
뭉툭한 하부로부터 나오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