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차가운 손 - 한강

P.20 왜 내 삶의 가운데는 텅 비어 있는가

P.223 나는 약 한 달에 걸쳐 이 기록을 써내려왔다. 이것을 쓰는 동안 나는 무엇인가를 찾고자 했던가? 단지 일어난 모든 일들을 재현하려고 했던가?
⠀인상적인 일은, 이 스케치북을 펼치고 만년필이 종이를 미끄러져 나갈때마다 마치 어떤 막을 더듬거리고 있는 듯한 기분이 되곤 했다는 것이다. 찐 계란의 껍질을 벗길 때 드러나는 얇고 흰 막 같은 것. 그랬던가. 내 삶의 기억이란, 그 연약한 막 위를 더듬어 나아가고 있었던가.

⠀이따금 나는 만년필을 내려놓고 생각했다. ‘왜?’라는 단말마의 물음을 들이댔을 때 꺼내 보여줄 수 있는, 진짜 이유라는 것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과연 있을까. 진짜를 보고 싶다면 결국, 심연 앞에 서는 일만이 남는 것 아닐까. 그 텅 빈 심연 속에서 대체 어떤 대답을 건져낼 수 있다는 것일까.

P.224 기록이라는 습관은 은밀히 매력적이어서, 앞으로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끊이지 않고 병행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P.242 너, 미끈미끈한 물고기처럼 내 손아귀에서 퍼덕이는. 거센 몸짓으로 허공에 떠올라, 밑 모를 물 속으로 달아나버리는.

P. 270 작가의 말

⠀새벽녘에 꾸었던 꿈, 낯선 사람이 던지고 간 말 한마디, 무심코 펼쳐든 신문에서 발견한 글귀, 불쑥 튀어나온 먼 기억의 한 조각들까지 모두 계시처럼 느껴지는 때가 있다. 바로 그런 순간들이, 내가 소설을 쓸 때 가장 사랑하는 순간들이다 여느때와 같은 일상이지만 전혀 새로운 감각으로 부딪쳐오는 숱한 의문들, 짧고 강렬한 각성, 깊숙이 찌르는 느낌 속에서 나는 일종의 자유를 느낀다.
⠀이 소설은 3년 전에 초를 잡아놓고 서랍 속에 넣어뒀다가, 지난해 2월에 꺼내 쓰기 시작했다. 소설과 함께 열두 달을 순회하는 동안 나에게 시간은 다른 속력으로 흘렀다. 언제나 그랬듯이, 내 몸에 머물렀던 소설은 가장 먼저 내 존재를 변화시킨다. 눈과 귀를 바꾸고, 당신을 사랑하는 방법을 바꾸고, 아직 걸어보지 못했던 곳으로 내 영혼을 말없이 옮겨다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