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53 어린 시절의 일기에는 ‘나’에 대한 말들로 가득했다. 내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일까를 알기 위해 애썼던 십대의 내가 거기 있다. 그러나 돌아보면, 나라는
존재가 저지른 일, 풍기는 냄새, 보이는 모습은 타인을 통해서만 비로소 제대로
알 수 있었따. 천 개의 강에 비치는 천 개의 달처럼, 나라고 하는 것은 수많은
타인의 마음에 비친 감각들의 총합이었고, 스스로에 대해 안다고 믿었던 많은
것들은 말 그대로 믿음에 불과했다.
P.73 그렇지만 쓰는 게 좋고 작가가 되지 않아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
계속 썼을 테고, 쓰다보니 작가도 되었을 것이다. 그들도 지금은 나처럼 “언제
작가가 될 거라고 생각하셨나요?”라는 질문을 받고 있을 것이다.
⠀사공 없는 나룻배가 기슭에 닿듯 살다보면 도달하게 되는 어딘가. 그게
미래였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저절로 온다. 먼 미래에
도달하며 ㄴ모두가 하는 일이 있다. 결말에 맞춰 과거의 서사를 다시 쓰는
것이다.
P.92 그냥 흘러가게 두었을 때, 삶은 자연스럽게 악몽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악몽을 문장으로 옮겨 쓰기 시작하고 나서야 내 안의 어둠은 조금씩 질서가
있는 이야기로 변화하기 시작했고, 나는 핸들에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비로소 주변의 세상에 눈을 돌릴 수 있었다.